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내가 그를 사랑했고 애굽에서 부르셨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깊은 아버지다움을 드러내는데, 이는 단순히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의 역사 속에서 자비로 작용하신다. 이 진리의 중심에는 선택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과 그가 자녀로 부르신 삶의 핵심인 용서의 행위가 있다. 그러므로 용서는 다른 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화목하게 하고, 회복시키며, 구원하는 것, 비록 용서하는 이에게 대가가 따르더라도 말이다. 용서는 단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반영하고 우리의 걸음이 그분 앞에서 음흉하게 정의되지 않도록 하는 결단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가 백성의 뿌리 뗀 땅으로 애굽을 부르는 선택에서 드러난다. 비록 포로의 기억이 상처의 기억을 불러일으킬지라도 우리의 용서는 바로 이 신성한 움직임처럼 되어야 한다: 정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벽을 허물고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해를 제공하는 것이다. 용서는 해를 입은 상처를 지워버리는 게 아니라, 죄를 심판할 권리를 주님께 넘겨드리는 것이며, 진정한 치유는 우리가 또한 우리를 지탱하는 은혜에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할 때 온다고 믿는 것이다. 실패의 시대에 용서는 과거와 하나님의 새로운 부름 사이의 다리가 된다.
각 독자가 보듯 용서는 선악의 칸막이인 칸트식 선택지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온 은혜에 대한 반응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면,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도록 부름받았고, 자유롭고 화해하는 말을 반복해야 한다. 용서는 사랑받는 자의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세상에 하나님의 얼굴을 드러내며, 아버지가 여전히 구원하고 집으로 인도하길 바라는 이들로 우리를 걸어가게 한다. 오늘도 우리는 용익의 길을 선택하여 관계를 양육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우리 사이에 확립되는 천국의 소망을 향하도록 이끌어주는 길을 걷기를 기도한다.